어릴 적 엄마 손을 잡고 처음 들어선 교보문고 광화문점의 그 압도적인 규모는 아직도 생생합니다. 지하로 내려가면서 마주한 끝없이 펼쳐진 책들의 바다, 그리고 그 사이를 조용히 거니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지식의 성전 같았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40여 년간 한국의 독서문화를 이끌어온 교보문고는 책 파는 곳이 아니라 우리 일상 속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주말이면 연인들이 데이트를 즐기고, 학생들이 공부하며, 직장인들이 퇴근길 잠깐 들러 마음의 양식을 채워가는 곳입니다. 온라인 서점이 대세인 요즘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발걸음을 향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마도 책과 사람이 만나는 그 특별한 순간의 마법 때문일 것입니다.
40년 전 혁신, 교보문고의 시작
1981년 봄, 서울 종로구 관철동 지하에 문을 연 교보문고 광화문점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파격적인 서점이었습니다. 그전까지 한국의 서점이라고 하면 대부분 좁은 골목길에 자리한 작은 가게들이었습니다. 점주 아저씨가 높다랗게 쌓인 책 더미 뒤에 앉아 계시고, "무슨 책 찾으세요?"라고 물어보면 직접 찾아주시던 그런 곳들 말입니다. 그런데 교보문고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일단 규모부터가 압도적이었어요. 지하 1층부터 3층까지 총 3개 층에 걸쳐 펼쳐진 거대한 공간에는 당시 기준으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책들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더 놀라운 건 고객들이 마음대로 책을 집어 들고 읽어볼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요즘에야 당연한 일이지만, 당시엔 정말 혁신적인 발상이었습니다. 창립자 신용호 회장은 "책을 통한 문화창조"라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책만 파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유롭게 지식을 탐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던 거죠. 그래서 처음부터 "편하게 둘러보고 가세요"라는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심지어 의자까지 곳곳에 배치해서 사람들이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물론 처음엔 우려의 목소리도 많았습니다. '책을 공짜로 읽게 해 주면 누가 사겠느냐'는 반응이었죠.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사람들은 오히려 더 많이 몰려들었고, 책을 미리 읽어본 후 구매하는 비율이 높아졌습니다. 무엇보다 서점 자체가 하나의 문화공간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책을 사지 않더라도 그냥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 친구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혼자 와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찾는 공간이 된 겁니다. 특히 지하철 1호선 종각역과 바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접근성 면에서 엄청난 장점이었습니다. 퇴근길에 잠깐 들르기도 좋고, 약속 시간 전에 시간 때우기에도 안성맞춤이었죠. 이런 입지적 조건과 혁신적인 운영방식이 맞물리면서 교보문고는 빠르게 한국 최대 서점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일상 속 특별한 공간이 된 대형서점
교보문고가 성공하면서 전국 곳곳에 대형서점들이 생겨났습니다. 영풍문고, 알라딘 등 각기 다른 특색을 가진 서점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이 서점들이 단순히 책만 파는 곳으로 남아있지 않았다는 게 정말 흥미로운 점입니다. 제가 대학생이었던 90년대 말을 떠올려보면, 서점은 정말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어요. 우선 데이트 코스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돈 없는 대학생 커플들에게는 따뜻하고 조용한 서점만큼 좋은 데이트 장소가 없었습니다. 서로 좋아하는 책을 추천해 주고, 함께 책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카페에서 차 한 잔 마시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당시 대학생들의 로망이었습니다. 또 공부하는 공간으로도 많이 이용되었습니다. 도서관이 문을 닫은 늦은 시간에도 서점은 열려있었거든요. 특히 시험 기간에는 참고서 코너에 학생들이 바글바글했습니다. 책을 사지 않고도 그냥 앉아서 공부할 수 있었으니까요. 지금 생각해 보면 서점 입장에서는 손해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걸 따지지 않고 너그럽게 공간을 내어주었던 것 같아요. "서점에서 만난 책 한 권이 인생을 바꿔놓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의미 없는 상업공간이 아니라 꿈과 희망을 파는 곳이라는 느낌이 든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복잡한 일상에 지쳤을 때, 아무 목적 없이 서점에 들어가서 이 책 저 책 들춰보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더라고요. 특히 시집 코너에서 좋은 구절을 발견했을 때의 그 기분이란! 마치 보물을 찾은 것 같았습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마트폰이 있어서 언제든 정보를 찾을 수 있지만,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하는 책의 매력은 여전합니다. 온라인에서는 내가 관심 있어하는 분야의 책들만 추천해 주지만, 서점에서는 평소라면 절대 손에 들지 않았을 책들과 마주치게 됩니다. 그런 우연한 만남이 때로는 새로운 관심사를 발견하게 해주기도 하고, 삶의 방향을 바꿔놓기도 합니다. 또 서점 직원분들의 도서 추천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 중 하나입니다. 특히 각 분야별 전문 직원들이 계시는데, 이분들의 추천은 정말 수준이 높습니다. "이런 책 좋아하시면 이것도 한번 보세요"라고 권해주시는 책들이 대부분 적중률이 높았습니다. 아마존이나 온라인 서점의 알고리즘 추천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습니다.
온라인 시대에도 살아남는 서점의 비밀
솔직히 말하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오프라인 서점들의 미래가 걱정되었습니다. 아마존, 예스24, 알라딘 같은 온라인 서점들이 더 싸고 편리하니까 사람들이 점점 그쪽으로 몰리는 것 같았습니다. 전자책도 보급되고, 특히 코로나19 이후로는 비대면 쇼핑이 일상화되면서 오프라인 서점들이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대형서점들은 지금도 꿋꿋하게 버텨내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새로운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이유를 곰곰 생각해 보니 몇 가지 특별한 가치들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첫 번째는 역시 실제 책을 만져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온라인에서는 표지 사진과 목차, 몇 페이지 미리 보기 정도만 볼 수 있지만 서점에서는 직접 손에 들고 느껴볼 수 있습니다. 종이의 질감, 책의 무게감, 심지어 새 책 특유의 냄새까지 말입니다. 특히 어린이책이나 예술서적 같은 경우에는 이런 차이가 더욱 크게 느껴집니다. 그림책의 색감이나 화집의 인쇄 품질 같은 건 실제로 봐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요리책도 마찬가지고요. 사진이 얼마나 선명한지, 레이아웃이 얼마나 보기 좋은지는 직접 펼쳐봐야 판단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세렌디피티, 즉 우연한 발견의 재미입니다. 온라인에서는 대부분 목적을 가지고 검색해서 책을 찾잖아요. 그런데 서점에서는 완전히 다른 책을 찾으러 갔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보물 같은 책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며칠 전에 저는 요리책을 사러 갔다가 옆에 있던 여행서적에 눈이 갔었습니다. 그래서 펼쳐봤는데 정말 좋은 책이었습니다. 만약 온라인에서 요리책만 검색했다면 절대 만나지 못했을 책이었을 텐데 이런 우연한 만남이 서점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는 사람들과의 자연스러운 만남입니다. 서점에서는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과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같은 책을 보고 있다가 자연스럽게 대화가 시작되기도 하고, 누군가 읽고 있는 책이 궁금해서 물어보기도 합니다. 특히 북클럽이나 독서모임 같은 것들이 활성화되면서 서점은 책을 매개로 한 커뮤니티 공간의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혼자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가끔은 다른 사람들과 감상을 나누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런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서점들이 책방을 넘어서 복합문화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요즘 큰 서점들 가보시면 책만 있는 게 아닙니다. 카페, 문구점, 음반가게, 심지어 작은 갤러리까지 한 공간에 다 있습니다. 교보문고만 해도 핫트랙스라는 문화용품 매장이 함께 있고, 각종 굿즈나 문구류도 판매하고 있습니다. 북카페에서는 책을 읽으면서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서 서점은 단순히 책을 사러 가는 곳이 아니라 문화생활을 즐기러 가는 곳이 되었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는 인스타그램 같은 SNS에 올릴 만한 예쁜 공간으로도 인식되고 있습니다. 책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고 있는 겁니다. 이런 변화들이 오프라인 서점이 디지털 시대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교보문고로 시작된 한국의 대형서점 문화는 상업공간을 넘어서 우리 사회의 문화적 인프라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지식을 탐험하고, 사람들과 소통하며, 일상의 여유를 찾을 수 있는 소중한 공간으로 자리 잡은 겁니다. 앞으로도 시대의 변화에 맞춰 계속 진화해 나가면서 우리의 독서문화를 이끌어갈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