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심장부인 구룡반도를 걸으며 만나게 되는 오래된 서점들은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좁은 골목길 사이사이에 자리 잡은 이 서점들은 홍콩만의 독특한 문화적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중국 본토와 서구 문화가 만나는 교차점에서 탄생한 광둥어 문학은 이곳 서점가에서 꽃 피웠습니다. 영국 식민지 시절부터 현재까지 격변하는 홍콩 역사 속에서도 굳건히 자리를 지켜온 이 서점들은 단순한 책 판매처가 아닌 문화 보존의 보루 역할을 해왔습니다. 일국양제라는 특수한 정치 환경 속에서 광둥어와 번체자로 쓰인 문학작품들을 지켜나가는 이곳은 홍콩 사람들의 문화적 자긍심과 정체성을 대변하는 상징적 공간입니다. 현대적 고층빌딩 사이에 숨어있는 작은 서점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홍콩만의 독특한 문학 세계를 만날 수 있습니다.
구룡반도 골목길에서 만나는 문학
홍콩에 처음 방문하였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바로 구룡 지역의 오래된 서점들이었습니다. 센트럴이나 코즈웨이베이 같은 관광지의 화려함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습니다. 몽콕이나 심사추이 뒷골목으로 들어가면 마치 70년대에 멈춰 있는 듯한 작은 서점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아르곤 서점이었습니다. 겉보기에는 정말 작고 낡은 가게 같았지만, 들어가 보니 천장까지 빽빽하게 꽂힌 책들이 압도적이었습니다. 대부분 광둥어로 쓰인 번체자 책들이었는데, 홍콩 현지인들이 실제로 읽는 문학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습니다. 이러한 서점들이 생겨난 배경을 알아보니 정말 흥미로웠습니다.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홍콩은 경제적으로 급속히 발전하였지만, 동시에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깊어졌습니다. 중국 본토와는 다른 홍콩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나가야 했던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광둥어 문학이 크게 발달하였습니다. 이전까지는 중국 본토의 표준중국어 문학이 주류였는데, 홍콩 작가들이 자신들의 일상 언어인 광둥어로 작품을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방언으로 어떻게 제대로 된 문학을 쓸 수 있느냐"는 비판도 있었지만, 점차 홍콩 사람들의 삶과 감정을 가장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는 언어라는 인식이 퍼졌습니다. 구룡 지역의 서점들은 이러한 광둥어 문학의 요람 역할을 하였습니다.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문학 모임을 주최하며, 때로는 출판까지 직접 맡기도 하였습니다. 상업적으로는 큰 이익이 없었겠지만, 문화적 사명감으로 버텨온 것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서점들에서 나온 작품들 중에는 나중에 홍콩 문학사에 길이 남을 걸작들이 많았습니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원작이 된 소설들도 상당수가 이러한 작은 서점에서 처음 선보인 작품들이었습니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이 서점들이 단순한 책방이 아니라 홍콩 문화의 산실이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변화하는 홍콩, 서점가의 현재와 미래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요즘 홍콩의 서점가는 예전만 못한 듯합니다. 특히 최근 몇 년간의 정치적 변화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2019년 홍콩 시위 이후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무엇보다 임대료 상승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홍콩 부동산 가격이 워낙 높다 보니 작은 서점들이 버티기 정말 힘들어진 상황입니다. 제가 좋아하던 몇몇 서점들도 문을 닫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매우 아쉬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적인 변화들도 있습니다. 젊은 세대들이 홍콩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해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독립 서점들을 적극적으로 찾고 있습니다. 특히 광둥어로 쓰인 문학작품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또 눈에 띄는 변화는 홍콩 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의 관심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대만,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다른 중화권 지역 사람들이 홍콩 문학에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서구권에서도 홍콩 문학 번역본들이 출간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국제적 관심은 홍콩 서점가에게 새로운 기회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서점들이 단순한 상업적 목적을 넘어서 문화 보존의 사명감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홍콩의 독특한 언어와 문학 전통을 지켜나가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서점 사장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경제적으로는 힘들지만 홍콩 문화를 지키는 일이라는 자부심으로 버텨나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특히 아이들에게 광둥어 문학을 소개하고, 홍콩의 역사와 전통을 알려주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광둥어 문학의 독특함과 세계적 가치
홍콩 서점가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광둥어 문학의 독특함입니다. 처음에는 저도 중국어는 중국어 아닌가?라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완전히 다른 언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광둥어는 표준중국어와는 발음도 다르고, 문법도 다르고, 심지어 어순도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광둥어로 쓰인 문학작품들은 표준중국어 문학과는 완전히 다른 리듬과 정서를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홍콩의 대표적인 작가 중 하나인 也斯(야스)의 작품을 보면, 홍콩 사람들의 일상적인 대화가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차찬텡(찻집)에서 나누는 대화, 트램을 타면서 느끼는 감정, 빅토리아 하버를 바라보며 드는 생각들이 광둥어 특유의 뉘앙스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또 흥미로운 점은 홍콩 작가들이 중국 고전문학과 서구 문학을 동시에 흡수하면서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작품들을 읽다 보면 홍콩이라는 도시의 복잡하고 다층적인 정체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홍콩 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영화입니다. 홍콩 영화와 문학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 왔습니다. 특히 구룡 서점가의 많은 소설들이 나중에 영화로 제작되었습니다. 왕가위, 허안화, 관금붕 같은 감독들의 작품을 보면 홍콩 문학의 영향을 강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도시의 고독감, 변화하는 홍콩에 대한 향수, 복잡한 인간관계 등은 홍콩 문학과 영화가 공통으로 다루는 주제들입니다. 반대로 홍콩 영화가 문학에 미친 영향도 큽니다. 영화적 기법을 소설에 도입한 작가들이 많고, 영화 시나리오 작가들이 소설가로 활동하는 경우도 흔합니다. 이러한 상호작용이 홍콩 문화의 독특한 매력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과 우려
솔직히 홍콩 서점가의 미래에 대해서는 복잡한 심정입니다. 한편으로는 홍콩의 독특한 문화가 계속 보존되고 발전하기를 바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어려움들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젊은 세대들이 홍콩 문화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을 보면 희망적입니다. 특히 해외에 거주하는 홍콩 사람들이 고향의 문화를 그리워하며 광둥어 문학을 찾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수요가 있는 한 홍콩 서점가는 계속 존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홍콩 문학이 점점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다는 점도 고무적입니다. 영어나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 소개되는 홍콩 작품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해외 문학상을 수상하는 홍콩 작가들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결국 구룡 서점가는 홍콩이라는 독특한 도시의 문화적 DNA를 간직한 보물창고 같은 곳입니다. 비록 현실적인 어려움들이 있지만, 홍콩 사람들의 문화적 자긍심과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소중한 공간으로서 계속 존재하기를 바랍니다. 홍콩을 방문하게 된다면 화려한 쇼핑몰보다는 이러한 작은 서점들을 찾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진짜 홍콩의 모습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